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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주의를 이끄는 것은 경제적 원리

역사의 흐름이 한 개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한 인물과 한 국가에 그 책임을 묻거나 그 공을 돌릴 때가 많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역사는 혹은 정치는 도덕과 인간 본성으로 그 변화의 원리를 숨기며 자신을 지운다. 레닌의 논의를 따라 제국주의를 읽는 것은 피지배와 피착취의 고통을 개인적 차원의 복수로부터 혹은 단죄로부터 떼어내 경제 정치적인 체계를 불러내는 일, 실재하는 삶의 마당으로 불러내는 일일 것이다. 제국주의적 양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초기부터 이미 문제적인 형식이었던 제국주의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늘 그래 왔듯이 도덕적 문제로 환원되곤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도달하는 자본의 메커니즘은 철저하게 그 자신의 원리에 충실한 체계적 흐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생산의 집적과 자유경쟁에 따른 결과물로서의 독점 자본 형성.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은행의 독점 자본으로의 전화. 결국 소수의 자본이 세계 자본을 분할하고 세계 자체를 분할 재분할 하는 흐름. 이 흐름들은 제국주의론에서 구체적 자료들을 통하여 일목요연하게 전개되고 있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의 최고 단계로 정의하며 그 경제 정치적 추이를 구체적 자료들을 통해 증명한다. 흔히 상반된 원리로 인식되곤 하는 자유경쟁과 독점 사이의 필연적 관계와 거대해진 자본의 질적 전화로서의 금융, 금융과두제의 모습도 자신을 드러낸다. 수와 이름이 되고 나서 개인 혹은 지역의 구체적 몸은 잊혀지고 지워지며, 분할, 즉 착취의 대상이 된다. 세계는 분할, 또 자본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은 재분할에 직면하게 되고, 사회적이 된 노동 뿐 아니라 사회적 생산물, 심지어 자본의 눈에 공적인 것들까지 사유되고, 독점의 첨병으로,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복무한다.

- 역설적이지만 제국주의의 소득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는 전세계적 소통의 메커니즘을 경쟁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그 나름 역사적 소임을 완수하였다. 철도를 비롯한 교통과 통신, 유통의 망을 거대화 시키는 과정은 동시에 생산을 사회화, 그것도 세계적 사회화에 이르게 하였으며, 지역적 차원의 소통을 세계적 차원의 소통으로 나아가게 하는 한 걸음으로 작용한다. 본문을 읽는 동안 가장 관심이 간 부분은 독점과 제국주의화의 과정에 놓인 이 철도와 은행의 역할이었다. 자본의 역사적 역할이 생산성의 향상뿐 아니라 소통의 네트워크를 배치하는 것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제국주의와 제국주의론 국가를 구축하다.

제국주의의 결과는 국가 개념의 확립 내지, 국가권력의 확대에 일조한다. 그런데 제국주의론 역시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 사적소유를 넘어선 또 다른 장애물, 공유

그런데 기회주의자들, 자본주의자들, 배외주의자들이 사회적 생산과 세계를 공간화를 통해 한정된 소유와 소유 경쟁의 문제로 사고하고 있는 것을 레닌 역시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보존을 위한 국가, 혹은 독재의 장이라는 해결 모두는 사회적 생산을 생산력이나 창조가 아닌 고정된 결과물에 한정시킨다. 귀속의 장소만 뒤바꾸는 것으로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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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펫
네그리, 『혁명의 시간』1부 2장 발췌 싱거운 책읽기

복사 http://blog.naver.com/alfet/50096364025

1절 / 불안정성을 탈출하는 시간의  생산성은 비가역적인 시간성, 카이로스의 시간성을 통하여...

1. 존재론적 힘으로서의 시간이 화살이라면 공통된 이름은 이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2. 지금까지의 논의는, 공통된 이름을 카이로스의 산물로 정립하는 가운데, 공통된 이름을 존재의 특수한 생산행위로 만드는 순간을 강조하였다.

공통된 이름이 조감 및 탐색으로서 나타나는 경우에서조차도, 또 상상력이 산물일 때에도, 그 생산의 불안정한 망설임이 계속해서 느껴진다. 불안정성은 진정될 수 없다.

3. 심리적 관점에서 이 불안정성은 의식의 순간들을 서로 구분하지 못하는 불가능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시간이 외관상으론 지속으로 보이게 된 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공통된 이름은 카이로스 속에서 그 현실성을 성취하긴 하지만 카이로스의 창조성과 그 비가역적인 힘을 증언하는 데로 돌려지지 않고, ‘이전’과 ‘이후’가 일종의 연속적인 직물을 일는 것을 증언하는 데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4. ...그렇다면 공통된 이름의 특이성을 결정할 가능성이란 없다. 그리고 시간은 힘의 화살 외부에 있는 운명으로서 재구성될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카이로스에 대한 경험에 의하여 반박된다.

5. 반면에 만일 -고전적 사유에서처럼- 순간이 시간의 정의로부터 제거되어 생성의 흔들림(존재와 무 사이의 흔들림)에 대한 찰나의 직관에 의해서만 정의 가능한 요소로 간주된다면 이름붙이기 행동과 이름붙여진 사물의 적실화에 의하여 결정되는 모든 경험은 부적실하게 될 것이며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6. *만일 우리가 공통된 이름에 시간의 화살의 방향을 부여하고 공통된 이름에 시간의 화살의 방향을 부여하고 공통된 이름을 그 특이성을 보존한 채 시간의 비가역성과의 관계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면, 공통된 이름을 시간성의 행동 혹은 프락시스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만 존재론은 그것을 가로지르는 불안정성을 탈출할 것이며 지식은 망설임을 낳는 모호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탈출하게 될 것이다.

2절 / 경험 속에서 시간의 진리-비가역성을 띤 카이로스의 시간

1. 시간의 화살의 관점 즉 그 일관성의 관점에서 보면, 카이로스가 존재론적 비가역성을 담지하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점이다. 카이로스가 전진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2. [카이로스->제노의 허위성“(전진하는) 카이로스의 힘과 (뒤로 움직이며 그러면서 카이로스를 분할하는) 궤변적 추론의 공존”+진실성“순간만이 존재론적으로 현실적이라는 것을 긍정하면서 ‘지속-시간’이라는 초월적 관념을 부순 것”을 드러냄]

3. ‘이름=이름 붙여진 것’ :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시간성의 힘에 의하여 표현되는 것 ->카이로스의 표현=존재론적 힘 = ‘진리의 존재론적 프락시스’

4. *공통된 이름은 따라서 존재를 긍정하는 한 방식이다. 즉 공통된 이름은 존재의 힘이며, 새로운 존재를 구축하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만일 우리가 이름과 사물의 적실화에서부터 공통된 이름의 (상상력에 의한) 표현으로 옮겨간다면 우리는 그 창조적 힘을 존재의 가장자리(시간의 비가역적 화살의 촉)에 위치시키는 진정으로 구성적인 작업을 목격하게 된다.

6. ‘진리의 프락시스’ : 맑스-저항의 규정적 (그리고 경향적)표현에서 출발하여, 프락시스가 구축하는 것의 진리를 확립하는 것을 말한다.

3절 / 카이로스의 시간성

1. 그러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자마자, 과거와 미래는 결코 명백한 것이 아니게 된다.

2. 이 첫번째 정의(과거와 미래의 일반적 정의)는 (그리고 이 첫 번째 오류는) 과거와 미래를 시간의 화살에 상응하여 고찰하지 않고 동질적인 차원에서 고찰하는 우둔한 경향 덕분에 존속한다. 그럼으로써 시간은 비가역성을 잃고 카이로스는 그 창조력을 잃는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

3. 시간을 연장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시간으로부터 모든 존재론적 일관성을 빼앗고 그리하여 과거와 미래로부터 일관성을 빼앗는 초월적 존재의 <권력>에 의존한다.

4.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미 존재한 존재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존재재란? 그것에 우리가 부여하는 이름은?[과거와 미래의 이름이란?]

4절  / 미래에 대한 새 규정

1. 따라서 대부분의 미래란 앞으로의 지속(duration)이다. 시간의 불연속성은 공간의 연속성에 종속된다.

2. 앞으로의 지속인 한에서 미래는 테크놀로지들의 바탕을 이루는 비전이다. 이 경우에도 시간적으로 경험적인 것은 선험적인 공간적 미적분법의 규범들로 환원된다. 그러나 현실은, 앞으로 존재하게 될 것에 대한 예견은 카이로스의 프락시스에서 나와서 그 도구의 시간성 속에서 구성될 때에만 타당하다.

3. 미래로 투여된 욕망 곧 유토피아/ ?????

4. … 미래 대신, '장차 올 것이라는 이름을 부여...이 이행은 항상 차이화(전과 달라지는 것)이며, 창조적 도약이다. 반복은 그리고 그와 함께 지속은 '장차 올 것'에 대한 현재의 경험에 의하여 해체된다. 그리고 현실적인 것은 이런 식으로 카이로스를 만드는 가운데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된다.

5. 우리는 다가오는 시간을 '장차 올 것'으로 정의하고, '장차 올 것'을 행동 속에서 존재론적 구성으로 정의할 것이다. 그리고 '장차 올 것'이라는 공통된 이름을 창안의 힘의 표현으로 (즉 카이로스의 힘-vis-)정의할 것이다.

6. 다름 아닌 현재를 자유롭게 전유하려는 싸움 속에서 삶은 '장차 올 것'에 스스로를 열며, 욕망은 빈, 동질적인 시간에 맞서서 프락시스의 창조적 힘을 인식하는 것이다. ……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카이로스의 도구들이다. 삶 속에서 탄생하여 삶 속에서 발전하며,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장차 올 것'을 생산한다.

5절 /과거에 대한 새 규정 그리고 카이로스의 영원한 현재

1. 존재와 관련된 진실은, 현재의 직접성 내에서는 '모든 것이 창조되며, 아무것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과거-완료된 인간적 사건들의 침전을 따라 확대되는 현존의 연속적인 발생-라는 잘못된 생각 그러나 우리 이전에 일어난 일을 창출할 활력을 그리고 거기에 표현된 카이로스의 단자들의 힘을- 매 순간- 회복하지 않고, 그 일을 지나쳐 간 시간의 침전으로서만 보는 것은 시간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창조적 힘에 대한 경험]을 거슬리는 것이다.

3. …그러나 현재로 과거를 조명하는 식으로 말고는, 과거를 재구축하고 그것이 현재 속에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는 식으로 말고는, 선행한 존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란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역사적 프락시스라는 공통된 이름은 '현재의 계보학'일 수밖에 없다. 즉 '장차 올 것'을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전에 온 것'을 존재하도록 하는 상상력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한다.

4. 카이로스가 낳은 혁신이 바로 세계를 창출한다. 말하자면, '이후'에 오는 것을 생산하면서 '이전'에 온 존재를 생산하는 것이다. 혁신 즉 이름의  창조적 힘은 항상 특이하며 구체적이다. 결과적으로 과거에서도 미래에서도 '생성'이란 없다 오직 이미 있었던 것과 앞으로 있게 될 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만 있을 뿐이다.

5. 영원은 '이전'에 오는 시간이다. 이는 실로 축적된 삶의 힘이며, 비가역적인 불멸의 시간성의 힘이다. 영원은 현재 존재하는 존재의 공통된 이름이다. 모든 카이로스는 이 영원 속에 자리한다.

6. [이것은 카이로스를 과거로 밀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를 카이로스의 현재로 만드는 것] 시간적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순서란 없다. 카이로스와 영원한 것의 일종의 동시간성을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영원한 것은 카이로스가 있는 장소에서의 일관 즉 동시적 일관이기 때문이다,

6절/영원한 것이라는 공통된 이름의 표현, 선행하는 불멸의 존재에 대한 인식

1. 첫째, 우리에 선행하는 불명의 존재에 대하여 '모호한'방식[존재론적 타자]으로 생각할 수 없다. ...영원한 것은 '카이로스-존재'와 다르지 않다. 카이로스는 차이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을 연장하는 한에서, 삶으로 겪은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영원한 것을 증가시키고 혁신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2. 둘째, '유추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반대로 카이로스의 가호 아래 스스로를 실현하며 현이 계보학에 의해서만 실질적으로 될 수 있는 존재의 덩어리 속에 위치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 유추적 방법과 변증법은 둘 다 절대적인 것을 확장하는 것은 유한이며, 영원한 것의 힘으로 하여금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것은 카이로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4. [무한이 아닌 영원] 영원한 것 속에 있다는 것은 '생산'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영원한 것을 '실존하는 것을 자신이 외부에 두는 운동'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실존 자체 내에 위치시키는 생산으로 보도록 한다. 이러한 일관성을 토대로 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것을 생산하는 진리의 프락시스를 구축할 수 있다.

5. 그렇다면 카이로스는 영원한 것 속에 있다. 카이로스가 바로 창조하는 영원한 것이다/ 이 영원한 것은 우리에 선행한다. 그 가장자리에서 우리의 창조활동이 일어나고 존재 즉 영원을 확장하는 활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카이로스가 여는 모든 것은 영원하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에 대한 책임이 있는 동시에 영원을 생산할 책임이 있다.

7절 / 측정불가능성

1. 만일 '이전'이 영원하고 '이후는 장차 올 것이라면 시간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화살은- 이 이전과 '이후' 사이의 생산의 측정불가능성이다.

2. 이름과 사물의 적실화는 '여기 이것'의 표현에 의하여 '동시에' 확립된다는 이유로 '측정불가능한'이라는 말은 '막연한' [정의되지 않은 앎의 과정을 토대로 하는] 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불확정적일 수도 없다. 카이로스의 표현의 산물은 항상 특이하기 때문이다.

3. 표현의 존재론은 어떻게 그 자신을, 측정 불가능한 것 속에서의 유한하고 확정적인 생산으로서 형성하는가?즉 공통된 이름의 공통적 형태를 구성하는 힘이란 무엇인가? - 토포스와 텔로스 사이이 관계에 대한 이해의 심화를 통하여 2부에서.

4. 유물론의 존재론적 탐구의 지형/측정불가능한 이행 속에서의  존재론적 탐구의 구축 - 다음 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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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펫

일기부터...

노출증 2009/11/06 03:00
쓰기를 잊은 지가 오래 되다보니 자연스런 글, 아니 자기에게 말 거는 글쓰기조차 생소하다.
글쓰기를 공개적인 아닌 부분부터 다시 시작행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생각이나 감정을 말하는 데, 왜 이리 장애가 많은지,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긴 하지만, 어쩌랴. 그저 조금씩 다시 말 배우듯 해야 하는 것을...그러다 보면 말문이, 글문이 트이겠지.
그 첫 시도가 아무래도 부끄러운 고백이 될 듯한 건 역시 술 때문.
한동안 술이 내 맘대로 되 줘서 즐거웠는데, 살짝 비집고 나오더니 순식간에 나를 잡아먹어 버렸다. 
그저 그날의 무사를 무한 감사하는 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엎어진 물.
그리고 두려운 기시감.
사람들 마음에 나쁜 물결 일으키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작은 소망.
시선과 기억으로부터의 자유와 허세 아닌 자존심을 지키고, 혹은 찾을 수 있길 바란다는 큰 소망.
곁들여본다.
읽은 것에도 자의식 없이 눈치 보는 일 없이 코멘트 하는 날.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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